현대인의 필수품 사진, 초창기의 사진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아서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다. 사진을 대중화 시킨 인물의 이야기
지금 당신의 휴대폰에는 몇 장의 사진이 들어있을까?
스톡미디어 전문매체인 photutorial에서 2024년에 발표한 흥미로운 통계에 따르면 사람들은 휴대폰에 평균 약 2100장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약 95%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루에 전 세계에서 찍히는 사진의 수는 약 47억 장이며, 산술적으로 나눠보면 전 세계 사람들이 하루 약 0.5장의 사진을 찍고 있으니 최소 이틀에 한 장은 사진을 찍는 셈이다. SNS에 올라오는 그 많은 사진들을 생각해 보면 이제 사진은 현대인들의 일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사진을 두고 물품(物品) 혹은 물건(物件)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좀 애매하다. 예전에는 분명 종이에 인화된 '물건'이었는데 이제는 휴대폰이나 컴퓨터의 화면으로 보는 게 더 익숙하고, 저장 장치에 기록된 디지털 정보의 상태로 존재하니 '물건'이라 부르기에는 상당히 일시적이고 추상적인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2000년 이후 출생자들에게는 사진이라고 하면 이쪽이 더 익숙한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이전 출생자라면 그래도 최소 한 번 이상은 본 적이 있었을 ‘필름’이 카메라의 표준 매체이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디지털카메라를 태어나서 처음 다루어 봤던 것이 대학교 다니던 1998~1999년 무렵이었고, 디지털카메라 동호인 사이트로 시작했던 디씨인사이드가 처음 개설된 것이 1999년 무렵이니 그 이전에는 ‘사진’하면 일단 필름이었다.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간단하게 사진 매수의 제한 없이 거의 무한대로 팡팡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사진 생활에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카메라 구입과는 별개로 돈을 주고 필름을 사야 했고 신중하게 한 장 한 장 아껴서 찍은 다음, 사진관에 맡겨서 다시 돈을 내고 현상과 인화를 해야만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꽤나 불편하고 번거롭기까지 했다. (물론 필름 카메라 애호가들은 이 불편함 또한 필름 카메라가 가지는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름으로 사진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사업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편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필름이 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오히려 그 편리함 덕분에 시장을 빠르게 석권하고,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진의 표준매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필름을 처음으로 상업화해서 사진의 대중화를 이루어 낸 사람은 바로 이스트먼 코닥사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이다.

조지 이스트먼은 1854년 7월 12일 새벽 2시 뉴욕의 워터빌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조지 이스트먼의 부모님이 대 농장의 소유주였기에 꽤나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1862년에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어릴 때는 고생이 좀 심했다. 특히 조지 이스트먼이 14세가 되던 1868년부터는 집안 형편이 굉장히 어려워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보험사에서 알바를 하며 생계를 도와야 할 정도였다.
쉽지 않았던 19세기 사진 생활
조지 이스트먼이 20세가 되어 은행에 취업한 이후부터는 형편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 부가 수입을 위해 부동산 투자를 해보려고 돈을 열심히 모았는데, 실제로 현장실사를 위해 여행까지 떠났던 일이 있다. 이때 현장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 카메라를 큰맘 먹고 구입했는데, 하필 그놈의 카메라가 너무 무겁고, 챙겨가야 할 것도 너무 많은 데다가, 그 와중에 사용하기도 상당히 번거로워서 결국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건 실패하고 만다. (짐이 많아 포기한 건지 과정이 어려워서 실패한 건지 확실치는 않다)
이 무렵의 카메라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사용하기 불편한 물건이었다. 이 당시에는 습판(wet plate)이라는 걸 이용해서 사진을 찍었다(Collodion Process). 습판을 이용한 방식은 기존에 비해 매우 발전된 방식이긴 했지만 여전히 사용하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번거로웠다. 습판 사진은 유리판에 약품을 잘 펴 바른 후 암실에서 질산은 용액에 담갔다가 꺼낸 다음, 유리판이 젖어 있는 상태 그대로 카메라에 장착해서 장시간(수십 초~수 분) 노출해서 촬영을 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발라놓은 약품이 말라버리면 현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약품이 마르기 전, 그러니까 약 15분 이내에 약품 처리에서부터 암실에서의 현상까지 전부 다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미리 여러 장의 사진판을 준비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진사가 한 장의 사진을 찍기 바로 직전 유리판에 직접 약품을 바르고 사진 찍고 바로 현상까지 마치는,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 야외촬영을 한번 하려면, '이동식 암실'을 챙겨가야 함은 물론, 유리판과 약품들, 현상을 위한 각종 도구들을 카메라와 함께 다 챙겨가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짐이 정말 '한 짐'이었고, 한번 움직이는 것 자체가 정말 큰일이었다. (자료를 찾다 알게 된 것인데, 국내에 이 습판 사진을 촬영해 주는 스튜디오가 있다. 가격이 비싸서 아직 망설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이용해볼까 싶은 생각도 있다.)


그 사건 이후로 조지 이스트먼이 사진을 더 편리하게 만드는데 몰두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의 첫 출사가 실패로 돌아간 것에 꽤 ‘빡쳤’ 던 게 아닐까 싶다.
1871년 Richard L. Maddox 박사가 사진 건판(Dry Plate)을 발명하자 이에 주목하여 건판을 자신만의 공정으로 제작하는 방법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장비를 새로 개발해서 1880년에 특허를 취득하고, 로체스터에 사진 건판 제조 공장을 연다. 사진 건판은 습판에 비하면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약품이 마른 채로 사진을 촬영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진을 촬영하기 직전에 약품을 직접 바를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건판을 미리 만들어두는 것이 가능했고 별도의 제조사가 판매하는 건판을 구입해서 사용할 수도 있었으니 사진사가 할 일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촬영을 마치자마자 현상을 서두를 필요도 없었으니 여로모로 편리한 물건이었다.
이 건판 사업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게 되면서, 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Henry A. Strong이라는 사업가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이듬해인 1881년 1월 1일, 조지 이스트먼과 Henry A. Strong이 'Eastman Dry Plate Company'라는 합작회사를 설립, 그해 연말에는 아예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필름 - 편리함을 뛰어넘어 더 편리하게
건판은 습판에 비해 편리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부분들이 있었다. 부피가 크고 무거웠고 유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깨지기 쉬웠다. 또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건판을 교체해야 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불가능했다.
1881년 위스콘신의 농부인 피터 휴스턴(Peter Houston)과 동생인 데이빗(David Houston)이 건판의 불편함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한다. 종이처럼 유연한 재료에 약품을 코팅하여 이걸 실을 감는 실패(Spool)처럼 생긴 물건에 돌돌 말아서 넘기며 여러 장의 사진을 연속적으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최초의 롤필름(Roll Film)인 셈이다. 두 사람은 롤필름과 그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특허를 냈지만 (US patent #248,179 for Photographic Apparatus) 본업이 농부였기에 실제로 이를 생산하고 판매할만한 여건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때 조지 이스트먼이 이 특허의 라이선스를 얻어 필름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예 거금 $5,000(2024년 현재 가치 약 $17만)에 이 특허를 사버렸다.

이스트먼이 처음 필름을 만들 때는 특허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종이를 사용했다. 잘 휘어지면서도 적당히 얇고 질기면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기에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종이는 그 입자가 사진에 이런저런 흠을 만들었기에 종이를 대신할 다른 재료를 찾아야만 했다. 그때 주목한 것이 그 무렵 실용화되고 있던 셀룰로이드였다. 우리가 알던 합성수지 필름에 가장 근접한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셀룰로이드는 종이가 갖는 결점이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필름의 재료로 잘 쓰이긴 했지만 사실 매우 위험한 재료였다. 셀룰로이드는 나이트로 셀룰로스(nitrocellulose)와 장뇌를 혼합해서 만드는데 원재료에 nitro-가 붙는 것만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인화성이 매우 커서 화재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한참 뒤인 20세기 초반부터 아세테이트로 재료를 바꾼다. (군필자, 특히 행정병이라면 이름만 들으면 아! 할 수 있는 아스테이지가 바로 그것이다.)

1888년, 조지 이스트먼은 아주 기가 막힌 상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우선 휴대하기 매우 편리한 형태의 카메라를 출시했는데 가격은 단돈(?) $25였으며, 100장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이 미리 내장된 형태였다(현재가치로 따지면 $820 정도 되니 사실 적은 돈은 아닐지도).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무거운 건판을 따로 휴대할 필요가 없었다. 사진을 찍고 싶으면 카메라만 들고 다녀도 충분했다. 여기에 이스트먼은 새로운 서비스를 한 가지 덧붙인다. 카메라에 내장된 사진을 다 찍은 뒤 $10를 동봉하여 이스트먼의 회사로 보내면 회사에서는 사진을 인화해서 고객에게 보내줬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다 해드릴게요(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광고 슬로건에 걸맞게 암실에서 이루어지던 어렵고 귀찮은 현상작업을 회사가 대신해 준 것이다. (이 슬로건을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광고 전문가에게 의뢰했는데 그 전문가는 이 서비스가 얼마나 혁신적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과물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여기에 ‘빡친’ 이스트먼이 직접 슬로건을 작성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 방식은 기존의 사진 생활을 완전히 바꿔버린 혁신이었다. 고객들은 더 이상 직접 암실에서 독한 화학약품을 만질 필요가 없었다. 그저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기만 하면 된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현상하는 사람이 분리된 셈이다. 사진이 전문가의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이다. 사진을 예술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인 전문가들과 달리 그저 일상을 기록으로 담고 싶었던 대중들은 더 이상 어렵고 복잡한 현상작업을 공부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진을 뽑기 위해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던 20세기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식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100년 넘게 이어졌던 사진생활 방식을 처음 사업모델로 도입했다는 이 점은 필름의 진가를 알아보고 특허를 인수한 것 이상으로 이스트먼의 혜안이 돋보이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필름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최초의 필름 역시 이 사업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조지 이스트먼 - 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사업가 (下)
조지 이스트먼의 또 다른 업적 - 영화용 필름, 코닥의 광고 캠페인 코닥걸, 이스트먼의 말년과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가 되며 몰락한 코닥에 관한 이야기 2024.06.17 - [현대의 일상을 만든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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