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이스트먼의 또 다른 업적 - 영화용 필름, 코닥의 광고 캠페인 코닥걸, 이스트먼의 말년과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가 되며 몰락한 코닥에 관한 이야기
2024.06.17 - [현대의 일상을 만든 사람들] - 조지 이스트먼 - 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사업가 (上)
조지 이스트먼 - 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사업가 (上)
현대인의 필수품 사진, 초창기의 사진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아서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다. 사진을 대중화 시킨 인물의 이야기 지금 당신의 휴대폰에는 몇 장의 사진이 들어있을까? 스톡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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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도 필름이...
이스트먼이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사진만이 아니었다. 영화산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영화에도 필름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1889년에는 처음으로 상업용 영화 필름을 제작해서 공급하는데 당시 영화제작용 카메라를 개발하고 있던 토머스 에디슨은 이 필름을 기반으로 카메라를 만들어냈다. 이는 영화 역사에 있어서 매우 기념비적인 일로, 영화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훗날 조지 이스트먼은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 된다. 넓어진 사업 영역에 맞춰서 이 해에 사명을 Eastman Company로 바꾸었고, 다시 3년 뒤인 1892년에는 뉴욕에 Eastman Kodak New york를 설립하는데, 이때부터 회사는 이스트먼 코닥사로 불리게 된다. 여담이지만 사실 Kodak이라는 단어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고 한다. Eastman이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말이 종종 들려서 조지 이스트먼 본인이 Kodak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이전부터 K라는 글자가 어쩐지 좀 강하고 예리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K로 시작하고 K로 끝나는 단어를 만들기 위해 글자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다 보니 Kodak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더욱 대중적으로 - The Kodak Girl
1893년에는, 최초의 Kodak Girl 캠페인을 시작해서 휴대용 카메라를 손에 든 여성을 과감하게 광고의 전면에 내세운다. 여성들도 쉽게 휴대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휴대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함과 동시에, 사진을 전문 사진사의 영역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영역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것이다.
특히 가볍고 휴대하기 편하고 누구나 다루기 쉬운 카메라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점은 이 무렵에 출시된 카메라들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1897년의 포켓 코닥, 1898년의 폴딩 코닥을 비롯, 1900년에 출시된 명작 브라우니 카메라는 단돈 $1에 심지어 어린이용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시되었다.



사회 공헌 그리고 말년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시장을 지배하자 이스트먼은 자선사업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1928년, 컬러 필름이 최초로 출시된 것을 살아생전 볼 수 있었으니, 100년간 이어지는 필름 시대의 창시자로서 사진 필름의 처음을 이끌었고 또한 그 완성을 지켜본 셈이다.

다만 말년에는 노환이 찾아와서 힘겨웠던 모양이다. 마지막의 약 2년간은 척추에 이상이 생겨서 상당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32년 3월 14일, 심장에 총을 쏘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To my friends: My work is done. Why wait?
친구들에게 -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네.
더 기다릴게 뭐 있나.
G.E
유서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당시 그의 건강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희망 없고 불필요한 여분의 삶을 스스로 잘라낸 것인데,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안락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내가 할 일은 다 마쳤다고 말하는 저 한 문장만큼은 스스로의 천명, 혹은 소명을 알고 그것을 충실히 마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니, 어떤 면에서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디지털카메라 시대와 몰락
사진 시장의 대제국으로 군림하던 코닥이 디지털카메라 시대를 맞아 몰락했다는 사실, 그것도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개발해 놓고도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코닥의 몰락 이유에 대한 많은 분석들이 있지만 필름시장의 위축을 우려해서 디지털카메라를 상용화하지 않았고 이것이 패착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했던 것이 1975년이고 그 무렵의 시장점유율이 미국기준 필름 90% 카메라 85%였으니 필름 시장을 고수하는 건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디지털 시대가 오더라도 2~30년은 더 걸릴 테니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편리함을 무기로 시장을 지배했던 기업이 또 다른 편리한 물건으로 시장에서 몰락하는 것을 보면 시대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그렇게 잊힌 브랜드인 줄 알았던 코닥을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발견했다. 그것도 의류코너에서. 코닥 상표를 달고 있는 의류들을 보며 이들이 과거의 이미지를 벗고 의류제조로 새로 사업 진출을 한 것인 줄 알고 놀라움반 걱정반의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옷들은 국내의 의류업체가 코닥의 브랜드를 라이선싱 해서 출시한 제품들이란 것을 뒤늦게 알고서는 살짝 김이 새고 말았다. 좀 더 찾아보니 이런 식으로 코닥의 브랜드를 라이선싱 해서 판매하는 제품들이 의류 말고도 조금 더 있었다. 코닥이 이제는 브랜드 사용권을 타사에 팔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좀 씁쓸했다.

필름 카메라의 추억
어릴 적 우리 집에도 필름카메라가 한 대 있었다. 독일의 Rollei 35 시리즈 중의 하나였는데, 한때 세계에서 가장 작은 35mm 카메라라고 하는 타이틀이 있었던 작고 귀여운 카메라였다. 그 카메라를 몇 번 써봤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노출계가 없었던 것을 봤을 때 C35 모델이었던 것 같다. 작고 귀엽고 사진이 잘 나오기는 했지만, 사진을 잘 찍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노하우가 필요한 재미난 카메라였다. 가장 큰 특징은 카메라에 배터리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셔터를 눌러 사진 한 장을 찍은 다음 본체의 레버를 젖혀주면 필름이 딱 그만큼 감기면서 다음장을 찍을 준비가 되었고, 필름 한통을 다 찍고 나면 본체 아래에 접혀있는 와인더의 작은 손잡이를 펴서 손으로 빙글빙글 돌려서 되감아줘야 했다. 조금 불편했지만 이건 사진 찍을 때에 비하면 그래도 사소한 불편이었다. 렌즈는 줌기능이 없는 40mm 단렌즈가 달려있었고 피사체와의 초점을 직접 렌즈의 다이얼을 돌려 맞춰줘야 했으며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직접 일일이 맞춰줘야 했다. 무엇보다 노출계가 없었기 때문에 실내, 맑은 날의 야외, 흐린 날 등등 환경에 맞는 적당한 세팅 값을 항상 외우고 다녀야 했다. 그나마도 외워뒀던 세팅값이 셔터를 누를 때의 환경에 맞게 제대로 적용이 되었는지는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인화하기 전까지는 알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살 떨리는 맛(?)이었다. 세팅값을 잘 못 맞췄다면 비싼 필름값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요. 지나간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시간이 흘러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나는 이 카메라가 왠지 좀 창피했다. 당시에 한창 출시되던 자동카메라에 비하면 너무 구닥다리 고물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자동카메라는 미래지향적으로 매끈한 외형에 플래시가 내장되어 있었고 렌즈가 모터로 죽 나왔다 들어가는 멋진 줌 기능이 들어있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찍어도 잘 나오는 노출값을 자동으로 맞춰줬으며 셔터를 누르면 필름이 자동으로 감기는, 마치 조지 이스트먼이 그토록 꿈꾸던 ‘당신은 버튼만 누르세요’의 최종 진화형 같았다. 최첨단 전자동 카메라들에 비하면 모든 것을 수동으로 하는 우리 집의 그 카메라는 너무 초라했다.
그런 사춘기 청소년의 창피함에 결정타를 날린 건 같은 반 친구 녀석이었다. 그 나이에 벌써 여자들과 바다에 놀라간다며 (이 대목이 가장 짜증 나는 부분이다) 카메라를 빌려달라던 녀석에게 카메라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데 셔터를 누르고 필름 감는 레버를 젖히던 내게 녀석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풉. 그런 것까지 손으로 해야 하냐?”
그나마도 없어서 빌려가는 녀석이 말본새 하고는…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카메라를 손에 쥐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본가의 잡동사니 더미 속에 파묻힌 채 기억 속에서 잊혔던 그 구식 카메라가 다시 생각난 건 10여 년쯤 전 처음으로 DSLR을 손에 쥐고 한창 사진에 입문하던 무렵이었다. 사진을 제대로 배우려면 수동으로 찍어야 한다던 인터넷상의 많은 사진 선배들의 항변을 접하고 보니 문득 그 시절의 그 수동 필름카메라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만약 어릴 때부터 그 카메라를 계속 꾸준히 쓰면서 사진을 배웠더라면 지금쯤은 ‘고수’가 되어있으려나 하는 상상을 한번 해봤다. 만화 이니셜D에 등장했던 도요타 86이 ‘드라이버를 키우는 자동차’라면 모든 것을 손으로 해야만 했던 이 롤라이 35는 ‘사진작가를 키우는 카메라’였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런 상상은 회귀물 웹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허망했다. 그 카메라를 꾸준히 써 왔더라도 결국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지금처럼 많이 찍고 시행착오를 겪을 여력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서민 가정의 학생에게 꾸준히 나가는 필름값과 현상료는 지나치게 큰 금액이었다. 비용문제는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했다. 꾸준히 들어가는 고정비는 사진을 배우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가 필요한 입장에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한번 더 깊이 생각을 해 보니 필름 카메라는 역시 사진을 배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면들이 있었는데, LCD를 통해 바로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는 달리 지금의 이 세팅값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운 좋게 세팅값이 맞아 좋은 사진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한 장 찍을 때마다 노트에 따로 기록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나중에 사진을 보고서는 세팅값을 기억해 낼 수도 없었다. 결국 ‘현타’가 와서 롤라이 카메라를 쓰는 걸 그때는 깨끗이 포기했다.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잘 눌러 뒀던 롤라이 카메라를 향한 마음은 얼마 전부터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옛날 물건을 쓰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옛 물건에 담겨있던 그 추억과 감성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보니 사춘기 때의 그 창피했던 마음마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다이얼과 레버를 일일이 직접 조작해야 했던 불편함은 톱니바퀴와 스프링으로 작동되던 아날로그 기계가 가진 날 것 그대로의 투박한 매력이었다. 회로가 집약된 전자제품의 편리함이 대신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맛이다. 살짝 흐릿한 화질과 그 독특한 색감은 그 시대의 화풍(畵風)이요, 사진을 보기 위해 며칠 기다려야 하던 지루함은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오는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다리던 설렘이었다.
오랜만에 꺼내 본 앨범 속에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니 그 구닥다리 카메라가 오랫동안 꾸준히 담아준 건 걱정 없이 마냥 행복했던 어린아이의 그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련한 카메라를 다시 찾아보려고 본가의 잡동사니 더미를 뒤졌지만 결국 찾지는 못했다. 이사하며 버린 짐과 함께 내다 버린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인터넷에 올라온 중고매물을 훑으며 괜히 서성인다.
https://youtu.be/cdbx7zDfvwg?si=dMXAwVM5hjzeQo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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