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질소 고정법(하버-보쉬법)을 발명한 과학자 프리츠 하버와 불행한 가정사, 명암이 나뉘는 프리츠 하버의 업적.
2024.06.12 - [현대의 일상을 만든 사람들] - 프리츠 하버 - 축복과 재앙을 함께 가져다준 과학자 (上)
프리츠 하버 - 축복과 재앙을 함께 가져다준 과학자 (上)
농업에 꼭 필요한 질소비료. 하지만 질소를 이용하는게 어려웠던 근본적인 이유,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낸 과학자의 이야기 농부의 걱정나는 어렸을 때 밥을 잘 안 먹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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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소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낸 과학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의 증산이 절실하던 1900년대 초,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암모니아(NH3)를 합성하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프리츠 하버(Fritz Jakob Haber)다.

프리츠 하버는 1868년 12월 9일 서부 폴란드의 브레슬라우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1886년 학부에 진학한 이후 1891년 5월 방향제 및 향료에서 발견되는 유기화합물인 피페로날을 주제로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1년간 군대에 복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죽 학업에 열중한 모양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가며 1898년에는 카를스루에 공대의 부교수가 된다. 그리고 1901년 8월 3일에는 클라라 임머바르(Clara Helene Immerwahr )와 결혼한다.

그녀는 당시 여성이 대학교육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독일에서 여성 최초로 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단한 인재였다. 하지만 여성에게 차별적이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 때문에 독립적인 연구활동은 포기하고 프리츠 하버의 뒤에서 묵묵히 연구를 도왔다고 한다.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프리츠 하버의 아내가 아니라 한 사람의 화학자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르니 애석한 일이다. 남겨진 몇 안 되는 사진을 보면 미모가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과학계의 아이돌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프리츠 하버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멋진 여성과 결혼한 것인지 궁금했다. 의문은 하버의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보고 나서 풀렸다. 그의 대표사진과 달리 그도 한창때는 훈훈했던 것이다.

인류를 먹여 살린 연구. 하지만…
약 10여 년간 꾸준히 연구를 이어가며 몇 가지 중요한 유기화합물의 전기화학적 제조법을 발견해 내던 그는 1908년, 드디어 실험실 규모에서 질소-수소 기체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연구 인생 최대 업적이자 인류에게는 큰 선물이 되었던 공중질소 고정법(Haber process)을 발명한 것이다. (후일 여기에 카를 보슈(Carl Bosch)가 촉매를 개선하여 대량 생산의 효율을 높이는데 이 공로를 인정해서 하버-보슈법(Haber-Bosch process)이라고도 불린다.)
이 발명이 있었기에 인류는 얼마든지 인공 질소비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휴경이나 윤작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식량생산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16억이던 인구가 현재 70억 가까이 될 수 있었던 건 하버와 보슈 두 사람의 공로다.

그러나 동시에 프리츠 하버의 이 발견을 통해 화약 역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이는 1차, 2차 세계대전 동안의 대량 살상을 불러왔다. (화약의 주 재료로 니트로셀룰로오스, 니트로글리세린, 니트로구아니딘 등을 사용하는데 죄다 Nitro-가 붙어 있다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한 가지 발명이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을 동시에 불러온 점이 꽤 의미심장한데, 그의 이후 행보 역시 그의 발명처럼 상당히 역설적이었다.
프리츠 하버는 살상용 독가스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실전에서 사용함으로써 ‘화학전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의 군사행동에 명백히 찬성하며 지지한다는 사회 지도층의 뜻을 천명하는 93인 성명서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어서 전시내각의 화학 분야 수장이 되어 참호전을 위한 독가스와 방독면을 개발했다. 심지어 바로 다음 해인 1915년 4월 2일에는 독일의 염소가스 공격이 최초로 실시되었을 때, 그가 직접 독가스 사용을 감독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평소 적극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닐 정도였으니,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전쟁 중 그의 행보는 또 다른 비극을 낳고 말았다. 독가스가 실전에 사용되고 채 보름도 지나지 않은 1915년 5월 2일, 아내 클라라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녀는 평소 남편의 독가스 개발과 사용을 끈질기게 반대해 왔으나, 결국 실제로 독가스를 사용하고 말았고 그런 남편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그녀를 자살로 내몰았다.
그렇게 아내를 잃고 나서도 그의 행보는 변하지 않았다. 1918년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이때도 여전히 독일 육군의 극비 화학무기 연구 프로그램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으니, 노벨상의 취지를 생각해 본다면 상황이 꽤나 역설적이다.
씁쓸한 말년 - 조국이 그를 배신하다
그간의 업보라고 해야 할까, 1931년 나치즘이 발흥하자 유태인 출신이었던 프리츠 하버에게도 상황이 매우 나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유태인 태생이지만 오래전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1차 대전에 헌신한 바 있으니 자신의 애국심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근무하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유태인 추방령이 내려와 연구소의 책임자에서 사퇴한다. 이후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영국 등 여러 곳을 거쳐 1934년 1월 29일 이스라엘의(당시 팔레스타인) 다니엘 시프 연구소의 초대 소장직을 맡게 되어 개소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망한다.
한 사람의 과학자가 이토록 이중적인 업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 듯싶다. 식량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류에게는 매우 큰 선물을 안겨주었지만, 대량살상무기인 독가스를 개발하고 사용하면서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혹자는 이를 두고 ‘주화입마’에 걸린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 부르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리 단순하게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세상이 그저 전쟁 없이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쟁 앞에 인류애라는 이상주의는 그저 허망할 뿐이다.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된 이상 죽고 죽이는 야만적 폭력 앞에서는 오직 이기는 것 만이 정의다. ‘과학자는 평화로울 때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조국을 위해 봉사한다. (Im Frieden der Menschheit, im Krieg dem Vaterland)’는 프리츠 하버 본인의 말처럼 과학자들은 숙명처럼 딜레마를 가진 채 일할 수밖에 없다. 우린 항공기술 덕분에 편하게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같은 기술을 폭격이나 공중전에 쓰기도 한다. 원자력으로 발전소를 지을 수도 있지만 핵폭탄을 만들 수도 있으며 로켓기술로 우주탐사를 하지만 미사일을 만들기도 한다. 전투 중 총알이나 포탄에 맞아 죽으나 독가스를 마시고 죽으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우린 총기나 포탄의 개발자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현재 인류는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화학무기도 그 위력을 직접 겪어 보았기에 최후의 순간까지 사용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1차 대전을 치렀던 그가 단순히 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사용했다고 비난하는 건 어쩌면 온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에게 국가를 위한 대의가 있었는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한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그는 그저 과학자로서, 독일인으로써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그의 행보를 불편하게 느끼는 건 어쩌면 인류를 위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그저 선한 일만 하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만 그의 행보가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분명한 비극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스파이더맨의 명대사 '큰 힘에는 큰 책임도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가 떠오른다. ㅎ)

그리고 사족
본문에서 잠깐 언급한 구아노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대략 호주와 하와이의 딱 중간쯤에 있는 태평양의 어느 섬나라 이야기다. 그 섬은 이름이 나우루라고 하는, 대략 크기가 용산구쯤 되고 인구는 약 1만 명 정도 되는 작은 나라다.
https://maps.app.goo.gl/6Uqz5vXnjZiCYJ2i7
나우루
www.google.co.kr
원래 19세기, 유럽인들에게 발견되기 전에는 원주민들끼리 평화롭게 살던 나라였다. 제국주의 시절 이 섬도 식민지배를 피하지는 못했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이 섬은 구아노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돌아가며 점령하기도 했는데, 1968년 독립 이후 구아노의 채굴권을 돌려받으면서 나라 전체가 돈방석에 올라앉는다. 당시 인구가 대략 13000명 정도였다는데 구아노를 판 돈으로 전 국민이 부자가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80년대에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 일본의 3배가 넘을 정도였고,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매일 하와이 싱가포르로 쇼핑을 다녔으며, 제한속도가 40km/h인 도로 1개만 있는 섬에 람보르기니 포르셰 등이 넘쳐났다고 한다. 나라가 돈이 많으니, 각종 서비스업은 전부 외국인이 했고, 외국인 가정부에 심지어 공무원조차 외국인이었다.
이런 일의 결말이 그렇듯, 구아노는 점점 고갈되어 갔고, 이에 대한 대비가 전무해서 관광이든 어업이든 다른 산업은 그 기반이 다 망가져서 산업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신나게 돈잔치 할 때는 좋았는데, 나중에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게다가 국민들이 막상 다시 일을 하려니, 전 국민이 일하지 않는 습성이 몸에 밴 데다가 위기감을 느낀 일부가 일을 해보려고 해도, 일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리고 말아서 빨래나 청소 같은 집안일조차 할 줄 모르게 되어버렸다.

결국 2007년 1인당 GDP가 2500달러까지 주저앉아버리는 바람에 한때는 조세 피난처 역할을 하면서 먹고살기도 하고 난민을 받아주는 대가로 호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부작용으로 난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혼란이 심했다. 다행히 2023년 기준 GDP가 11,000달러 선까지 어찌어찌 회복은 했고 지금은 원주민들도, 난민들도 다들 적응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한다. 다만 여전히 전기나 식수 등의 필수 자원이 부족해서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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